대전 화학연구단지 인근 주민의 특이질병, '만성 노출성 유기용제 신경병증'
첨단 연구도시의 그늘, 정체불명의 신경질환 급증
대전 유성구는 국내 대표 화학 및 과학 연구시설이 밀집된 첨단 과학도시다. 이곳에는 수십 년간 다양한 실험과 개발이 진행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주변에는 연구원과 관련 종사자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밀집해 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지역에서 원인 미상의 신경계 이상을 호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손끝 감각 저하, 만성적인 두통, 기억력 저하, 쉽게 피로해지는 신체 변화 등이 대표적이다. 병원을 찾아도 정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하거나 단순 신경쇠약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아, 환자들은 근본적인 치료 없이 고통을 겪고 있다.
지역 보건단체와 환경운동연합이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 일부 주거지와 인근 하천, 토양에서 톨루엔, 자일렌, 벤젠 등의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지속적으로 검출되었다. 특히 '트리클로로에틸렌(TCE)'은 신경 독성뿐 아니라 간독성, 발암 가능성까지 제기된 유해물질로 분류된다. 문제는 이들 물질이 실험실 및 화학 공정에서 흔히 사용되며, 장기간 노출 시 뇌 신경세포의 손상, 말초신경 염증, 운동신경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지역 환경노출에 기인한 특이질병, 즉 만성 노출성 유기용제 신경병증으로 정의하고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유기용제의 은밀한 침투와 누적 노출의 위협
유기용제는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며, 공기 중에서 증발하여 호흡기를 통해 인체에 들어오거나 피부 접촉을 통해 체내로 흡수된다. 문제는 노출 경로가 다각적이고 노출 자체가 인지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특히 주거지 근처에 위치한 소규모 실험시설이나 방류 처리 불완전 지역에서 누적된 유기용제가 지하수나 실내공기를 오염시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
이러한 물질들은 축적 노출의 결과로 중추신경계 기능 저하, 말초신경 민감도 저하, 근력 약화, 만성 피로 등의 형태로 서서히 증상을 드러낸다. 일반적인 검사로는 확인이 어렵고, 대부분이 여러 해에 걸쳐 누적되기 때문에 특정 질병으로 진단되기까지 수년이 소요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해당 질병은 '침묵의 특이질병’으로 불릴 만큼 감지와 관리가 어렵다. 유성구에 거주 중인 60대 주민 A씨는 “처음에는 단순한 신경통인 줄 알았는데, 손끝 감각이 무뎌지고 걷기도 어려워졌다”며 “여러 병원을 돌아다녀도 정확한 병명을 듣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제도적 공백과 주민 건강권의 사각지대
현재 국내 산업보건 및 환경안전 관련 법률은 사업장 내 유해물질 관리에 집중되어 있고, 일반 지역사회 내 비의도적 노출에 대한 규정은 극히 부족하다. 대전처럼 산업지역과 주거지역이 인접해 있는 구조에서는 환경 유해물질의 외부 유출 가능성이 높음에도, 실제로 이를 관리하거나 대응하는 체계는 미비하다. 이는 유기용제에 노출된 주민들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진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보건당국의 도움도 받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로 이어진다.
게다가, 연구시설 특성상 정보 비공개 또는 유해물질 사용 내역 비공시 관행이 존재하여, 지역 주민은 어떤 위험물질이 자신들의 생활 반경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이 같은 정보 비대칭은 질병 발생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 전문가들은 “유기용제 노출에 따른 특이질병은 보건 영역을 넘어, 주민의 생존권과 환경 정의의 문제”라며,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정보공개와 역학조사 실시, 피해자 중심의 건강 추적 관리 시스템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예방과 대응, 지역 기반 건강 모니터링 체계 구축 필요
유기용제 노출로 인한 만성 신경병증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다중적인 대응 체계의 구축이 절실하다. 먼저, 화학연구시설 및 주변 공정 시설의 유기용제 사용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설 내부 환기 및 폐기물 관리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인근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정기적인 신경계 건강 검진 및 설문조사, 혈중 유기용제 농도 검사, 신경전도 검사 등을 포함한 포괄적 건강 모니터링이 시행되어야 한다.
또한 지역 보건소와 대형 병원, 환경기관 간 연계를 통해 ‘지역 환경성 질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유사한 증상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조기에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환경교육 강화와 함께, 실내 공기질 자가진단 키트 보급, 고위험군 대상 무료 검진 프로그램 운영 등 생활 밀착형 정책도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중장년층과 노년층을 위한 이동형 검진센터 및 건강 상담소 설치는 현실적인 예방 전략이 될 수 있다.
결국, 이 특이질병은 단순한 의학적 문제를 넘어 환경적 책임, 정책적 실천, 지역사회 참여가 어우러져야만 해결 가능한 이슈다. ‘만성 노출성 유기용제 신경병증’은 이름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역과 세대를 넘어 삶의 질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이다. 지금이야말로 과학도시의 이면을 직시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적극적인 보호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