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질병

전남 여수 석유화학단지 근로자의 특이질병, '방향족탄화수소 흡입성 백혈구 감소증'

sudi-news 2025. 7. 25. 07:12

거대한 산업시설 속 보이지 않는 위험, 백혈구가 사라지는 병

 전라남도 여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LG화학, 한화솔루션, 롯데케미칼 등 대형 기업들이 밀집해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 화학산업의 심장부로 불릴 만큼 활발한 생산과 물류 활동이 이루어지며, 약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상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산업활동 이면에는 건강과 직결된 위험 요소들이 잠재되어 있다. 특히 최근 수년간 여수 석유화학단지 내 현장 근로자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원인 미상의 백혈구 감소증은 단순한 피로나 감염의 결과가 아닌, 지속적인 방향족탄화수소 노출에 의한 특이질병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방향족 탄화수소 흡입성 백혈구 감소증, 지속적 방향족 탄화수소 노출에 의한 특이질병

 

 백혈구 감소증은 신체 면역 체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백혈구 수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지는 상태를 말하며, 이로 인해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되고 각종 감염병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항암치료, 자가면역질환, 심각한 바이러스 감염 등이 주된 원인이지만, 여수 지역에서는 특정한 의학적 원인 없이 반복적으로 백혈구 수치가 저하된 사례가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관찰되고 있다. 특히 공정 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호소하는 피로, 식욕부진, 미열, 피부 염증 반복 등의 증상은 면역력 약화로 설명되며, 이들 중 일부는 조직 검사를 통해 골수 기능 저하 징후까지 보였다.

 

방향족탄화수소, 석유화학 산업의 그림자 독성

 방향족탄화수소(Aromatic Hydrocarbons)는 석유화학 공정에서 흔히 발생하는 화학물질군으로, 대표적으로 벤젠, 톨루엔, 자일렌 등이 있다. 이들은 고휘발성 유기화합물로 작업 중 공기 중에 증발하거나, 정비·청소 중 피부와 호흡기를 통해 인체에 흡수될 수 있다. 특히 벤젠은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1군 발암물질로 지정할 만큼 높은 독성을 가지고 있으며, 골수 세포를 억제해 백혈구, 혈소판, 적혈구 생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장기 노출 시 골수억제성 질환, 재생불량성 빈혈, 심지어 백혈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서울의 한 산업의학연구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수 석유화학단지 내 특정 공정 근로자 87명을 대상으로 혈액 검사를 진행한 결과, 전체의 19%에서 경도의 백혈구 감소 소견이 발견되었고, 이 중 상당수가 벤젠과 톨루엔 노출 이력이 5년 이상 지속된 고위험군이었다. 더욱이 개인 보호장비 착용이 일관되지 않거나 환기 시스템이 미흡한 작업장일수록 백혈구 수치 저하가 두드러졌다는 결과도 함께 제시되었다. 이는 단순한 환경적 피로가 아닌, 화학물질에 의한 누적 독성 반응으로 백혈구 생성이 억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노동자의 고통과 산업보건의 공백

 여수 석유화학단지에서 근무하는 B씨(54세)는 최근 몇 년간 잦은 감기와 피부 염증으로 병원을 찾았다. 혈액 검사에서는 백혈구 수치가 지속적으로 낮게 나타났지만, 병원은 별다른 치료 없이 “경미한 바이러스 영향일 수 있다”는 설명만 반복했다. 그러나 B씨는 “밤샘 작업 후 몸이 가려우면서 열이 나고, 땀이 나면 피부가 벗겨질 정도”라며, 자신의 증상이 단순 피로나 노화 때문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다. 그는 특히 “벤젠 냄새가 심한 구역에서 일한 날엔 꼭 몸에 이상이 생긴다”며, 작업 환경과 질병의 연관성을 호소하지만, 이를 명확히 입증할 방법이 없어 답답함을 토로한다.

 

 문제는 이처럼 증상이 분명해도 정확한 진단 기준과 질병 분류가 모호하기 때문에 제도권 내에서 의료적 보호를 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산업재해 신청 역시 화학물질 노출과 백혈구 감소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증명하지 못하면 승인이 지연되거나 기각되기 쉽다. 게다가 사업장 내 건강검진도 대부분 간단한 문진과 일반 혈액검사에 그쳐, 백혈구 감소와 그 원인을 조기에 포착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는 결국 산업 현장에서 반복되는 화학 노출 피해를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며, 노동자들의 건강권은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지역기반 특이질병으로의 인식과 제도적 대응 전략

 ‘방향족탄화수소 흡입성 백혈구 감소증’은 일반적인 질병으로 쉽게 분류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특정 지역, 특정 산업 환경, 특정 직무군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지리적·직업적 특수성 속에서 뚜렷한 질병 패턴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지역기반 특이질병으로 분류해야 마땅하다. 우선 여수 석유화학단지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정밀 혈액학적 분석과 장기 추적조사, 벤젠 및 기타 휘발성 유기화합물 노출량 측정, 그리고 개인별 노출 이력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필요하다.

 

 더불어, 고위험군 근로자에게는 정기적인 골수 기능 검사와 면역계 관련 건강 모니터링이 제공돼야 하며, 산업보건 주치의 제도를 통해 작업환경과 증상의 연계성에 대한 전문적인 해석과 조언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방향족탄화수소 노출로 인한 백혈구 감소가 의심되는 사례에 대해 산재 판정 기준을 완화하고, 역학조사 자료를 반영한 유연한 판정 시스템 도입도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한 명의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수만 명의 화학산업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여수의 사례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위험’에 얼마나 무감각해져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경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