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질병 다큐: 작은 세상이 거대해지는 '앨리스 증후군'
내가 작아졌을까, 세상이 커졌을까?
누군가가 갑자기 손을 뻗었는데, 그 손이 자신의 몸보다 커 보였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방금까지 걷던 복도가 갑자기 운동장만큼 멀어졌다고 느낀다면, 혹은 자신의 머리가 엄청나게 커지거나 몸이 작아졌다고 느낀다면? 이런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감각을 실제처럼 경험하게 만드는 신경질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앨리스 증후군(Alice in Wonderland Syndrome, AIWS)이다.
이 질병의 이름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착안되었다. 소설 속 앨리스가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거나, 사물이 왜곡되어 보이는 장면과 유사한 증상이 실제 환자에게서 관찰되었기 때문이다. AIWS는 일종의 지각왜곡 신경장애로, 환자는 자신의 몸, 시간, 공간, 외부 대상을 정상적인 크기와 비율로 인식하지 못한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뇌가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이로 인해 환자들은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해하며, 심할 경우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시각과 감각을 지휘하는 뇌가 ‘착각’할 때
앨리스 증후군의 주된 증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마이크로옵시아(micropsia) : 사물이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 증상, 둘째, 매크롭시아(macropsia) :사물이 실제보다 커 보이는 증상, 셋째, 자기 신체 왜곡 : 손, 발, 얼굴, 몸통 등의 크기를 왜곡되게 느끼는 증상이다. 이 외에도 시간이 느리게 흐르거나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왜곡, 주변 소리의 왜곡, 공간의 깊이가 사라진 것 같은 환시 증상도 동반된다.
이러한 현상은 뇌의 후두엽·두정엽·측두엽 등 시각 및 감각 통합 영역에 일시적인 기능 이상이 생겼을 때 발생한다. 특히 편두통 전조 증상, 뇌전증, 바이러스성 뇌염, 모노뉴클레오시스 감염 후에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뇌의 특정 부위가 자극되거나 염증 반응을 겪을 경우, 외부 자극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해 이런 기이한 지각 경험이 발생하게 된다. 이 증후군은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서 일시적으로 흔히 나타나며, 신경계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시적 뇌 기능 오류로 발현되기도 한다.
실제 사례로 본 앨리스 증후군의 혼란
앨리스 증후군은 증상이 매우 생생하고 신체 감각을 동반하기 때문에, 환자에게는 강한 충격과 혼란을 유발한다. 특히 어린 나이에 처음 경험한 환자들은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느끼거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헷갈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환자는 “친구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보였다”고 했고, 또 다른 환자는 “문까지의 거리가 수십 미터처럼 느껴져서 걷는 것이 두려웠다”고 진술했다.
AIWS는 하루에 몇 분에서 몇 시간까지 지속될 수 있으며,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며칠 혹은 몇 주간 반복되기도 한다. 증상이 발현되는 동안은 인지력은 유지되지만 판단력은 흔들릴 수 있으며, 현실 검증이 어려워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사회적 활동 중 증상이 나타날 경우,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사람들 앞에 서게 되어 큰 불안과 부끄러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후유증 없이 증상이 사라지며, 환자는 그 당시 경험을 마치 꿈처럼 회상하게 된다.
정신질환과의 구분, 그리고 치료법
앨리스 증후군은 일시적이고 자발적으로 소멸되는 경우가 많지만, 증상 자체가 매우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정신질환으로 오인될 수 있다. 조현병, 해리성 장애, 환각성 우울증 등과 감별 진단이 필요한데, AIWS는 일반적으로 환자가 자신의 증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정신질환과 구별된다. 즉, 현실 검증력은 남아 있지만 지각만 비정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치료는 주로 원인 질환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진다. 편두통이 원인일 경우 예방약이나 항경련제, 스트레스 관리 치료가 사용되며, 바이러스 감염이나 뇌염이 원인인 경우에는 항바이러스제와 항염 치료가 병행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주 원인인 경우, 심리 상담과 약물치료가 함께 적용된다. 최근에는 MRI나 EEG를 통해 증상이 나타나는 동안의 뇌 활동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AIWS의 정확한 신경생리학적 원인 규명이 기대되고 있다.
왜곡된 현실 속에서도 현실을 지키기 위한 노력
앨리스 증후군은 아직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이지만, 뇌가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신경질환 중 하나다. 뇌는 단순히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기관이 아니라, 그것을 의미화하고 해석하는 능동적 편집자라는 사실을 이 질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제 현실이라기보다, 뇌가 조합한 인지적 재현물이라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감당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앨리스 증후군은 증상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립감, 오해, 불신이 더 큰 문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확한 진단과 공감 어린 대응,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 본인이 자기 경험을 왜곡된 감각이 아닌 일시적 뇌 반응의 결과로 이해하게 돕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현실이 흔들릴 때, 그것을 다잡는 것은 결국 지식과 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