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질병

대전 연구단지 방사선 기술자에게 발생하는 특이질병, 저선량 방사선 노출 유발성 만성 피로증후군'

sudi-news 2025. 8. 8. 22:05

보이지 않는 피로, 첨단 과학 현장의 이면

 대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학기술 도시이며, 그 중심에는 대덕연구단지가 있다. 이곳에는 국가핵융합연구소, 원자력연구원, 방사선의과학연구소 등 다수의 방사선 관련 기관이 밀집해 있다. 이들은 원자력 에너지, 방사선 의료기술, 반도체 검사장비 등 국가 핵심기술을 개발하는 핵심 인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도의 안전 통제하에 방사선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이들 기술자 중 일부가 지속적인 만성 피로, 집중력 저하, 수면장애, 면역 저하를 호소하며, 의료기관에서도 명확한 진단 없이 증상 관리에만 머무르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저선량 방사선 노출 유발성 만성 피로증후군.방사선 노출로 일어날수 있는 특이질병

 

 이 증상은 단순한 과로 때문이라기엔 작업 강도나 근무 시간과 무관하게 나타나며, 가장 공통된 환경은 정기적으로 저선량 방사선에 노출되는 실험실 환경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일부 직업환경의학 전문가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나타나는 이상 증상을 ‘저선량 방사선 노출 유발성 만성 피로증후군’이라는 새로운 특이질병 범주로 분류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대전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방사선 취급이라는 직업적 특성은 지역 기반 특이질병으로 규정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저선량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미세한 교란

 방사선은 고에너지 전자기파로, 고선량 노출 시 암 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저선량, 장기간 누적 노출이 인체에 미치는 만성적 영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1~10밀리시버트(mSv) 수준의 저선량 방사선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DNA 손상은 크지 않지만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 기능 저하, 면역세포의 염증 반응 지속, 산화 스트레스 증가 등의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가면역계의 미세한 교란과 대사 피로 증상으로 이어지며, 이는 바로 만성 피로증후군(CFS: Chronic Fatigue Syndrome)의 주요 병리기전과 유사하다.

 

 2024년 한국원자력의학원이 수행한 연구에서는, 방사선 관련 실험에 종사하는 기술자 58명을 대상으로 한 생체지표 분석에서, 대조군에 비해 미토콘드리아 활성 저하율이 29% 높고, 인터루킨-6, TNF-알파 등의 염증성 사이토카인 수치가 유의하게 높게 나타났다. 또한 자가보고식 피로도 평가에서 대상자의 63%가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피로’를 경험하고 있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수면장애, 근육통, 정신적 집중력 저하를 동반했다. 이는 방사선이라는 비물질적 노출이 실질적으로 인체 내 피로 유발성 염증 반응을 활성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험실 안의 침묵, 기록되지 않는 고통

 대전 Y연구소에서 방사선 실험을 담당하고 있는 L씨는 “별다르게 힘든 일이 없어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하루 종일 몸이 축 처진 상태로 지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활력이 넘쳤지만, 최근에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근육통이 잦아졌으며, 아무 이유 없이 기침이 나거나 눈이 피로하다”는 증상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검사 결과는 정상이지만 피곤하면 쉬라”는 말만 되돌아왔다고 한다. 또 다른 M씨는 “팀원들 다수가 비슷한 피로를 겪지만 누구도 진지하게 말하지 않는다”며 “이건 그냥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운명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은 공식적인 질병 코드나 진단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방사선 관련 업무는 법적으로 정해진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받고 있지만, 이 검진은 주로 혈액검사, 염색체 이상 여부, 갑상선 기능 검사 등에 집중돼 있다. 만성 피로나 신경계 피로도를 측정하는 항목은 전무하며, 저선량 피폭에 의한 피로감이 질병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산재로 인정받기도 어렵다. 그 결과, 방사선 기술자들이 겪는 만성적인 증상은 ‘기록되지 않은 고통’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특이질병’으로서의 제도적 인정 필요성

 ‘저선량 방사선 노출 유발성 만성 피로증후군’은 대전이라는 지역적 기반, 연구소라는 직업 환경, 그리고 방사선이라는 특수한 물리적 요인이라는 3요소가 결합된 전형적인 지역 기반 특이질병이다. 이를 예방하고 관리하기 위해선, 첫째로 방사선 기술자 대상 건강검진에 피로도 평가, 미토콘드리아 기능 지표, 자율신경계 반응 분석을 포함한 확장형 검진 체계가 필요하다. 둘째, 장기 누적 피폭량 외에 저선량 반복 노출에 따른 생체 변화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수집해, 이에 따른 질병 코드 및 기준을 신설해야 한다.

 

셋째, 만성 피로와 관련한 증상을 호소하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산재 인정 기준 확대와 직업성 건강감시 강화도 병행돼야 한다. 현재처럼 방사선에 의한 암이나 급성피폭만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구조는, 실제 피폭 피해자의 90% 이상을 제도 밖에 남겨두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소 내부에서 이러한 문제가 ‘자기관리’의 영역으로 머물지 않도록, 직업환경 보건의 관점에서 조직 차원의 건강관리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 과학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이들이, 과학이 아직 해명하지 못한 고통으로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은 산업과 국가 모두가 직면해야 할 문제다. 지금이 바로 그 침묵에 ‘질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환을 예방하는 데에 있어 ‘정량적 노출 기준’만으로는 인간의 신경·면역계 반응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의 전환이다. 방사선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 영향 또한 주관적 증상으로 간주되어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신체는 이미 피로라는 방식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 경고에 사회가, 제도가, 그리고 과학기술계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기록되지 않은 피로’가 더 이상 누적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방사선 기술자의 건강을 위한 실질적 감시와 보호체계가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