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공간에서 느껴지는 이상 신호
서울 강남 일대는 대한민국 뷰티산업의 중심지로 불린다. 성형외과, 피부과, 메디컬스파, 네일숍, 헤어살롱 등 수많은 미용 관련 서비스업체들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수백만 명의 고객이 매년 이곳을 찾는다. 이러한 화려한 산업의 이면에는 소리 없이 건강을 갉아먹는 위험이 존재한다. 최근 강남 지역의 미용 업종 종사자들 사이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각 이상, 피로감, 두통, 어지러움,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이 반복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헤어 디자이너, 네일 아티스트, 피부관리사 등 화학제품을 상시 다루는 직종에서 이러한 증상이 집중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근로자들은 “냄새가 너무 강하다”, “머리가 멍하다”, “눈이 자주 따갑고 두통이 계속된다”는 식의 호소를 공통적으로 하고 있으며, 일부는 의료기관을 방문해도 명확한 질환명 없이 단순 스트레스나 과로로 치부되기 일쑤다. 하지만 눈에 띄는 점은, 이러한 증상들이 매일 같은 작업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휘발성 화학물질이 주된 작업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최근 산업보건 전문가들은 '휘발성 화학물질 유발성 감각신경 피로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특이질병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은은한 향기 속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침투
헤어 제품의 고정제, 네일 아트의 아세톤·젤리제, 스킨케어의 향료 및 방부제 등 뷰티산업에서 사용되는 상당수의 제품은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 Volatile Organic Compounds)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물질들은 제품 사용 시 공기 중으로 증발하며, 호흡기 및 피부를 통해 인체에 침투한다. 대표적인 성분으로는 톨루엔, 포름알데하이드, 벤젠, 자일렌, 에틸아세테이트, 디에탄올아민 등이 있으며, 이들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신경독성 및 장기 노출 유해성이 보고된 바 있는 물질들이다.
국내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연구에 따르면, 강남 일대 7개 미용업소를 대상으로 한 공기 중 유해물질 측정에서 작업 중 평균 톨루엔 농도가 허용 기준치의 1.7배, 포름알데하이드는 3배 이상 검출되었고, 이 농도는 작업 종료 후에도 2시간가량 유지되었다. 해당 환경에서 3년 이상 근무한 미용인들 중 일부는 후각 감퇴, 손끝의 감각 둔화, 만성 두통, 시야 흐림 등의 증상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이들 중 다수가 말초신경 전도속도 저하 소견을 받은 사례도 있다. 이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감각신경계를 반복 자극해 피로 상태를 유도하거나, 말초신경 기능을 교란시키는 ‘지속적 피로 증후군’을 유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뻐지는 공간’에서 병들어가는 미용 종사자들
네일 아티스트로 8년째 강남에서 일하고 있는 P씨는 “하루에도 수십 번 아세톤과 젤을 쓰고, 고객 손에 얼굴을 가까이 두고 일하다 보면 어지럽고 손끝이 저린 느낌이 든다”며 “최근에는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띵해져서 작업 중간에 환기하러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헤어 디자이너 K씨는 “스타일링용 스프레이나 펌약 냄새에 하루 종일 노출돼 있다 보니, 최근에는 손님과 대화가 길어지면 집중이 안 되거나, 어깨와 팔이 저리는 증상이 심해진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들 증상은 병원에서 ‘질병’으로 인식되기 어렵다. 아직까지 국내 보건체계상, 뷰티업 종사자를 위한 특수건강진단 항목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경계 기능 이상과 휘발성 화학물질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조차 미비한 상태다. 그 결과, 많은 종사자들이 스스로의 증상을 “체력 부족”이나 “스트레스”로 여기며 방치하거나, 간헐적인 증상이기 때문에 진단을 받지 못한 채 장기적으로 신경계 손상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산업적 책임의 부재이자, 제도적 무관심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감각신경 피로증후군, 특이질병으로 공식화해야 할 이유
‘휘발성 화학물질 유발성 감각신경 피로증후군’은 뷰티산업의 특정 직군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지역 기반의 직업성 특이질병이다. 이를 질병으로 인식하고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용 업종 종사자에 대한 노출 평가 및 특수 건강검진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 즉, 작업장 내 휘발성 유기화합물 농도를 상시 측정하고, 종사자의 말초신경 검사, 후각 민감도 측정, 시각신경 반응 테스트, 자율신경계 평가 등을 포함한 건강 검진 항목이 신설돼야 한다.
또한, 이러한 증후군을 조기에 탐지할 수 있는 산업안전교육, 자가 증상 체크리스트, 업무 시간당 환기 의무시간 확보 등의 근무환경 개선책이 마련돼야 하며, 감각신경계 이상이 발견될 경우 산재 적용 기준을 명확히 하여 의료 지원과 휴직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도 동반돼야 한다. 나아가 휘발성 화학물질을 다루는 제품에 대한 전 성분 공개 의무화, 저독성 대체물질 개발 장려, 업소 내 공기질 관리 기준 강화 역시 필수적이다. 향기롭고 아름다워야 할 뷰티 산업의 현장이, 숨 쉬기조차 어려운 위험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면, 이제는 이 질환에 이름을 붙이고, 보호할 사람을 정해야 할 때다. 휘발성 화학물질 유발성 감각신경 피로증후군은 그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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