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멈추지 않는 사람들
하루에 수차례 코피가 터지고, 아무런 외상 없이 혀와 잇몸에서 출혈이 일어나며, 피가 소화관으로 스며들어 만성 빈혈을 유발한다면 어떤 병을 의심해야 할까. 단순한 지혈장애나 혈소판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흔히 간과되는 희귀 유전질환인 '유전성 출혈성 모세혈관확장증(Hereditary Hemorrhagic Telangiectasia, 이하 HHT)'일 가능성이 있다. HHT는 전 세계적으로 약 5,000~8,000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상염색체 우성 유전질환으로, 출생 직후나 청소년기 이후부터 서서히 증상이 나타난다. 가장 흔한 초기 증상은 반복적인 코피이며, 심할 경우 하루 수십 차례 이상 출혈이 발생해 일상생활이 어렵게 된다.
이 질환은 혈관 벽을 구성하는 조직이 정상적으로 형성되지 않아 모세혈관이 확장되거나, 동맥과 정맥이 직접 연결되는 동정맥 기형(AVM)이 여러 장기에 발생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로 인해 출혈이 자주 발생하며, 혈관이 약해져 쉽게 터질 수 있다. 출혈은 피부 표면뿐 아니라 위장관, 폐, 간, 심지어 뇌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은 외형상 문제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코피만 자주 나는 체질’ 정도로 오인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장기 내부 출혈과 산소 공급 장애까지 유발하는 심각한 병리적 상태다.
장기 속 보이지 않는 위협, 혈관 기형의 확산
HHT의 무서움은 그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부에서 진행된다는 점에 있다. 피부나 점막의 출혈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장기 내부에 존재하는 동정맥 기형(AVM)이 이 병의 핵심 병변이다. 특히 폐에 AVM이 형성되면 산소 교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신에 저산소 혈액이 공급되며, 심할 경우 청색증, 호흡곤란, 뇌농양, 뇌졸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뇌에 AVM이 발생한 경우 출혈로 인해 경련, 마비, 갑작스러운 의식 소실이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예고 없이 진행된다. 간에 AVM이 존재하면 심부전, 간부전 등의 순환기계 이상이 동반된다.
이러한 장기 내 병변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진단이 어려우며, 특히 가족력이 명확하지 않거나 코피 외 증상이 경미한 경우, 질병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수년간 방치되기도 한다. 영상검사(CT, MRI, 심장초음파, 조영술 등)를 통해서만 AVM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으며, 정기적인 모니터링이 필수적이다. HHT 환자는 단순한 ‘코피 체질’이 아니라, 언제 어느 순간 심각한 출혈이나 뇌혈관 사고를 겪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셈이다. 이 병의 진정한 위협은, 그 은밀함에 있다.
유전자의 작은 결함, 전신을 흔들다
HHT는 대표적인 유전성 혈관 질환이다. 주요 원인 유전자는 ENG(엔도글린), ACVRL1(ALK1), SMAD4 등이 있으며, 이 유전자는 혈관 형성 및 유지, 내피세포 기능 조절에 관여한다. ENG 유전자의 변이로 인해 발생하는 HHT는 ‘HHT1형’으로, 폐와 뇌의 AVM 빈도가 높고, ACVRL1 변이에 의한 HHT2형은 간 병변이 많은 경향이 있다. SMAD4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진 환자는 드물지만, HHT와 동시에 위장관 종양을 유발하는 청소년성 용종증(Juvenile Polyposis Syndrome)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유전자는 모두 TGF-β(Transforming Growth Factor-beta) 경로와 관련이 있으며, 혈관 내피세포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안정되도록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혈관 형성이 비정상적으로 이뤄지고, 결과적으로 출혈이 잦아지며, 구조적 불안정성이 축적된다. HHT는 대부분 상염색체 우성 유전 방식으로 유전되기 때문에, 부모 중 한 명이 환자일 경우 자녀에게 50% 확률로 전달된다. 하지만 표현형의 다양성이 크기 때문에, 가족 내에서도 증상의 강도와 범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즉, 유전자의 아주 작은 결함이 평생을 위협하는 병이 될 수 있다.
치료보다 관리가 중심이 되는 질병
HHT는 아직까지 완치법이 존재하지 않는 병이다. 따라서 이 병은 치료보다는 조기 발견과 평생 관리가 핵심이 된다. 반복적인 코피는 비강 점막을 레이저로 소작하거나, 혈관경화제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출혈을 줄일 수 있으며, 위장관 출혈은 내시경을 통해 출혈 부위를 지혈하거나 약물로 조절한다. 폐 AVM은 색전술을 통해 병변을 막아 산소교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뇌나 간에 심각한 병변이 있다면 외과적 절제 혹은 고주파 치료가 시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치료는 ‘완치’가 아닌 ‘관리’의 연장선에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질병의 특성을 이해하고 평생 추적 관찰을 이어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HHT 환자를 위한 다학제 진료센터가 존재하지 않으며, 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병을 인식하고, 의료진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구조다. 일부 국가에서는 가족력 기반의 선별검사 및 유전자 진단을 권장하고 있지만, 비용과 접근성의 문제로 실현이 어렵다. 그 결과, 많은 환자들이 출혈과 빈혈을 반복하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고, 사회활동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HHT는 단순한 혈관질환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복합 만성질환이다.
‘작은 출혈’이 말하는 큰 이야기
HHT는 그 어떤 증상도 극적이지 않다. 코피, 잇몸 출혈, 가벼운 빈혈. 하지만 이 작은 신호들이 반복되고, 수년간 이어지며, 어느 날 폐나 뇌, 간에 존재하던 기형 혈관이 터지는 사건으로 연결된다. 이 질병은 극적인 발병보다는 서서히 위협을 쌓아가는 병이며, 환자들은 평생 ‘아무 일 없이 지내기 위해’ 준비하고 관리하며 살아간다. 외형적 장애가 없고, 급성 위기가 드물다는 이유로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져 있지만, HHT는 무형의 긴장감 속에서 환자들이 자신의 생명선을 지켜내야 하는 대표적인 특이질병이다.
이제는 질병 자체를 희귀성으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HHT처럼 희귀하고 은밀한 병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 수고, 존엄에 주목해야 한다. 출혈은 멈췄을지 몰라도, 불안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 병을 ‘조기 진단이 가능하고, 적절히 관리하면 일상 회복이 가능한 병’으로 만들어가는 일은 결국, 의료 시스템의 구조와 사회적 관심이 얼마나 균형 있게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HHT는 단지 혈관의 문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위기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존엄의 인프라를 되묻는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