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랭지 농업의 풍요 속 불청객, 저온작업이 부른 특이질병
강원도 평창은 대표적인 고랭지 채소 생산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해발 700~1,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재배되는 양배추, 배추, 상추, 무 등 고랭지 채소는 여름철에도 서늘한 기온 덕분에 고품질을 유지할 수 있어 전국적으로 수요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 뒤에는 저온, 습기, 반복되는 무릎 굽힘과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작업환경이 있으며, 이로 인해 특정 직업군에서만 발견되는 건강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저온작업성 하지혈관염’이라는 직업성 특이질병입니다.
이 질환은 주로 고랭지 재배 농가에서 장시간 서늘한 기후 속 노출된 채 무릎을 꿇거나 쪼그려 앉는 작업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발생합니다. 하지혈관염이란 다리의 말초 혈관에 염증이 발생하거나 순환 장애가 생기면서 붓기, 통증, 저림, 색변화 등의 증상을 유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강원도 고랭지처럼 기온이 낮고 습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경우, 혈관이 지속적으로 수축되고 말초 순환이 저하되어 염증 반응이 유발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2023년 강원대학교 의과대학이 평창군 고랭지 농업 종사자 4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약 14%가 ‘하지 혈관의 기능 이상 및 만성 염증 증상’을 호소했으며, 이 중 상당수는 매년 여름철 이후 증상이 악화되었음을 보고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근육통이나 관절염이 아닌, 지역 기후와 작업형태, 반복된 생체 스트레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특이질병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냉기와 반복작업이 만든 혈관 장애, 발생 메커니즘의 이해
저온작업성 하지혈관염의 핵심은 말초 혈관이 지속적으로 저온에 노출되며, 혈액순환 장애와 염증 반응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랭지 농업은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부터 작업을 시작해 기온이 가장 낮은 시간대에 야외 활동을 지속하게 되며, 이슬에 젖은 땅 위에서 장시간 무릎을 꿇거나 다리를 접는 자세가 반복됩니다. 이로 인해 무릎 아래 부위의 혈관은 기계적인 압박과 함께 냉기 자극을 동시에 받으며, 그 결과 혈관 수축 → 산소 부족 → 염증 반응 → 조직 손상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하지혈관염은 초기에는 단순한 피로, 뻐근함, 저림 등으로 시작하지만, 진행되면 다리의 붓기, 통증, 피부 변색(자주색 혹은 붉은 반점), 만성 염증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령의 농업인은 이러한 증상을 단순한 ‘나이 탓’으로 치부하거나, 냉찜질이나 파스 등으로 넘기고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아 문제를 더욱 심화시킵니다.
또한 고랭지 작업은 낮은 기온과 높은 습도의 이중 압박으로 인해 혈액의 점도가 증가하고, 하지 정맥류나 모세혈관 파열 등의 혈관 질환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특히 장화 속으로 습기와 냉기가 스며드는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 혈관 주변 조직의 염증이 심화되며 피부병, 하지 궤양, 감각 이상 등의 2차 증상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 환경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고랭지 농업 특유의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며, 유사한 증상이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평창, 정선, 인제, 태백 등지에서는 저온작업성 하지혈관염을 하나의 ‘지역 기반 특이질병’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습니다.
진단의 어려움과 방치된 피해자들
저온작업성 하지혈관염은 현재까지 정식 질병 코드나 산재 질환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 많은 농업인들이 적절한 진단이나 치료 없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일반 내과나 정형외과에서는 이 질환을 단순 혈액순환 장애, 하지정맥류, 관절염 등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에 따라 근본적인 치료보다는 통증 완화제나 물리치료에 그치는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이 질환은 단기 검사로 진단이 어려운 편입니다. 일반적인 혈액검사나 영상 검사에서는 특이 소견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냉자극 후 혈류 흐름 측정, 도플러 초음파, 하지 혈류역학 검사 등 특수 진단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는 이러한 장비를 갖춘 병원이 드물고, 고령층은 도시로의 이동 자체가 쉽지 않아 만성화되기 쉬운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2022년 평창군 의료원 조사에서는, 고랭지 농업인 중 하지 이상을 호소한 사람의 72%가 ‘정확한 병명을 들은 적이 없다’고 답했으며, 절반 이상은 단순 근육통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도 밝혀졌습니다. 이처럼 정확한 질환 인식 부재와 제도적 대응 미비는 질병 악화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만성 장애나 활동 제한, 삶의 질 저하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역 기반 특이질병이 질병분류 체계에 포함되지 않는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해당 질환을 질병으로 인정하고, 직업성 질환으로 등록하는 것부터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방과 제도적 개입: 고랭지 농민을 위한 건강 보호 전략
저온작업성 하지혈관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릎 아래 체온 유지와 작업자세 개선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 농민들에게 보온성과 방수 기능을 갖춘 작업복과 장화를 제공하고, 무릎을 보호할 수 있는 패드와 무릎담요, 발열 깔창 등을 적극 보급해야 합니다. 또한 농작업 중에도 적절한 스트레칭, 자세 교체, 주기적인 휴식 시간 확보 등이 가능하도록 농업 근로 조건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자체 차원에서는 고랭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건강관리 시범사업을 시행하여, 하지 혈관 질환 관련 증상 체크리스트 배포, 무료 혈류 진단 캠페인, 조기 진단 프로그램 운영 등을 실시할 수 있습니다. 특히 건강검진 항목에 혈관 기능 검사, 혈류 측정, 염증 표지자 검사 등을 포함시켜야 하며, 의심 사례는 도 단위 병원과 연계 진료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또한 이 질병을 ‘지역 기반 특이질병’으로 인정하고, 농작업 환경과 관련된 건강 피해에 대해 정부 차원의 보상 및 의료비 지원 체계를 도입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고랭지 작업 중 특정 조건(기온, 작업시간 등)에 따라 발생한 하지염증 환자에게는 진단명에 따른 치료비를 전액 지원하고, 장기적 혈관 손상에 따른 노동력 상실에 대해선 일정 수준의 보장 제도 도입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고랭지 농업이 단순한 농산물 생산을 넘어 ‘노동자 건강권’이라는 가치 위에 성립되어야 합니다. 평창은 국내 농업의 중심지 중 하나지만, 그 이면에서 건강을 희생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존재가 제도 밖으로 밀려나 있어선 안 됩니다. 저온작업성 하지혈관염은 지역 특성상 발생한 명백한 특이질병이며,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보건적 대응이 뒤따라야만 건강한 농촌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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