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의 또 다른 위험 요소, VOC 노출이 만든 피부질환
부산항은 대한민국 해상 물류의 중심지로, 연간 수천만 개의 컨테이너가 드나들며 다양한 산업화학물질이 취급되는 대형 항만이다. 항만은 단순히 물류만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화학제품이 저장·운송·하역되는 복합 작업장이며, 이 과정에서 다량의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 Volatile Organic Compounds)이 공기 중으로 방출된다. 최근 부산항 주변의 하역 근로자 및 탱크터미널 작업자들 사이에서, 특이하게 반복적이고 만성화된 피부염 증상이 보고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자극성 접촉피부염이 아닌, ‘VOC 노출성 접촉성 피부염’이라는 지역 기반 특이질병으로 주목받고 있다.
해당 질환은 얼굴, 목, 손, 팔 부위에 가려움, 발적, 비늘 형성, 수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항만 작업 후 특정 시간대에 증상이 악화되고, 주말이나 휴무일에는 호전되는 패턴을 보인다. 이는 피부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는 물질에 반복 노출될 때 면역체계가 과잉 반응하거나, 피부장벽이 약화되어 염증을 유발하는 지연형 알레르기 반응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문제는 항만에서는 다양한 VOC가 섞여 있어, 정확한 원인물질을 특정하기 어렵고, 다중 화학물질 복합 노출로 인한 예측 불가능한 반응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VOC와 접촉성 피부염의 과학적 연관성
VOC는 톨루엔, 자일렌, 스티렌, 벤젠, 에틸벤젠 등 다양한 화학적 구조를 가진 물질군으로, 대부분 기체 또는 액체 형태로 존재하며 쉽게 증발해 공기 중에 퍼진다. 이들 물질은 피부 점막을 자극하고, 표피 장벽을 손상시켜 면역계의 비정상적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특히 부산항에서는 석유화학제품, 용제, 산업용 세정제, 냉매, 화장품 원료 등 수입·수출 화학물질의 다양성과 양이 방대하여, 근로자가 정확히 어떤 물질에 노출되고 있는지 추적하기 어렵다.
미국 직업안전보건청(OSHA)과 유럽 화학물질청(ECHA)은 VOC가 호흡기뿐 아니라 피부에 의한 흡수도 주요 노출 경로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반복적 노출이 접촉성 피부염을 유발한다는 수많은 보고가 있다. 특히 여름철 고온·고습 환경에서는 피부의 흡수율이 높아지고 땀과의 반응으로 피부염 발생 빈도와 강도가 증가하게 된다. 부산항처럼 여름철 기온이 높고 습한 해안 환경에서는 이러한 VOC 피부 반응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2022년 부산시 보건환경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항만작업자 중 약 17%가 비특이성 피부염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 중 절반 이상이 VOC 관련 작업자였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현장 작업자의 고충과 제도적 공백
부산 신항에서 근무 중인 C씨(49세)는 최근 수년간 손목과 목 주위의 피부가 붉게 일어나고 가려움증에 시달리고 있다. 초기에는 단순한 햇볕 알레르기라고 생각했지만, 항만 작업일 후에만 증상이 반복되는 것을 인지하며 병원을 찾았다. 진단은 ‘만성 접촉성 피부염’이었지만, 병원에서는 명확한 유발 요인을 특정하지 못했고, 산재 인정을 받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말만 들었다. 그는 “매일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이 든 컨테이너 옆에서 일하는데, 도대체 뭘 맡았는지도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항만 노동자들은 노출 경로와 물질 확인이 어려운 환경에서 작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진단 체계는 미흡하다. 대부분의 VOC는 안전기준 이하로 노출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피부염이라는 증상 자체가 워낙 비특이적이기 때문에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어렵다. 또한 컨테이너 내부 공기질은 검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VOC 누출이나 증기 잔류에 대한 감시가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항만 근로자들은 반복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원인 규명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역 기반 질병으로의 인식 전환과 대응 전략
VOC 노출성 접촉성 피부염은 단순한 피부질환이 아니다. 이는 부산항이라는 공간에서 반복적·직업적으로 특정 유해 물질에 노출됨으로써 발생하는 지역기반 특이질병이다. 따라서 대응 역시 기존 피부과적 치료 중심에서 벗어나, 작업환경 개선, 노출 추적 시스템, 맞춤형 보호구 보급, 예방 교육 강화 등 다차원적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 부산시와 항만공사는 VOC 관련 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화학물질 노출 취약군 보호사업’을 검토 중이지만, 아직까지 VOC가 피부염의 원인이라는 인식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다.
선제적으로는 항만 현장 내 VOC 실시간 측정 장비 도입, 작업자 대상의 노출 이력 데이터베이스 구축, 피부 증상 발생자에 대한 역학조사 실시 등이 병행되어야 하며, 민간 병원과 연계한 피부건강 모니터링 체계도 마련돼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VOC 노출 관련 질환을 산업재해 기준에 포함시키고, 항만근로자를 고위험군으로 별도 지정하는 법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VOC 노출성 접촉성 피부염은 단지 부산항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항만 산업의 구조적 보건 사각지대를 상징하는 질환이다. 지금 이 질병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피해는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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