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다 못해 무감각해지는 신경의 이상
한밤중에 이유 없이 손발이 찌릿하거나, 양말을 신은 채로 걷는 듯한 감각이 들거나, 핀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반복된다면 단순한 혈액순환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 이런 증상은 흔히 무시되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신경계의 구조적 손상과 기능 장애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말초신경병증(Peripheral Neuropathy)은 척수와 뇌에서 이어지는 중심신경계가 아닌, 손과 발을 포함한 말초 부위의 신경이 손상되면서 나타나는 감각, 운동, 자율 기능 장애를 동반하는 복합 질환이다. 이 질환은 경미한 감각 저하에서 시작해 심각한 운동장애나 자율신경 이상까지 발전할 수 있어 조기 발견과 적극적인 관리가 필수적이다.
말초신경은 전신으로 퍼져있는 전선망처럼 작동한다. 이 전선이 마모되거나 끊기면, 뇌에서 보내는 명령이나 신체에서 느낀 감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신경이 손상되면 해당 부위에 이상 감각(저림, 화끈거림, 얼얼함), 감각 저하, 통증, 근육 약화, 심한 경우 마비까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손끝·발끝에서 증상이 시작되어 점차 퍼지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질환이 진행되면 보행에 어려움을 겪거나, 뜨겁거나 차가운 것도 느끼지 못해 외상이나 화상에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이처럼 말초신경병증은 단순히 불편한 증상이 아닌, 삶의 전반을 흔드는 만성적 신경 질환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원인이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손상
말초신경병증은 하나의 질환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유발되는 신경 손상의 결과로 나타나는 공통적 증후군이다. 가장 대표적인 원인은 당뇨병이다. 고혈당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말초신경의 혈액순환이 저해되고 대사장애가 생겨 결국 신경이 손상된다. 실제로 당뇨병 환자의 약 60~70%는 어느 정도의 말초신경병증을 경험한다. 이외에도 알코올 중독, 만성 신부전, 자가면역질환(루푸스, 쇼그렌 증후군), 암 치료제, 독성 화학물질 노출, 감염(대상포진, HIV, C형 간염) 등 다양한 요인이 원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일부 유전질환이나 비타민 B1, B6, B12와 같은 신경 관련 비타민 결핍도 중요한 요인이다. 최근에는 항생제나 항암제 등 특정 약물에 의한 약물 유발성 신경병증도 증가하고 있으며, 척추 디스크나 외상에 의해 특정 신경만 손상되는 단일신경병증(mononeuropathy)도 흔하다. 특히 손목터널증후군(수근관 증후군)은 가장 널리 알려진 단일신경병증의 사례다. 이처럼 말초신경병증은 원인 자체가 매우 복잡하고, 환자마다 손상 양상이 달라 정확한 진단 없이는 적절한 치료가 어렵다.
증상은 감각 이상부터 자율신경계 장애까지
말초신경병증의 증상은 감각신경, 운동신경, 자율신경 중 어떤 신경이 손상되었는지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감각신경 손상 시에는 저림, 얼얼함, 타는 듯한 통증, 찌르는 느낌 등이 나타나며, 때로는 ‘무언가 붙어 있는 느낌’ 혹은 ‘양말을 두 겹 신은 느낌’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통증은 밤에 심해지기도 하며, 옷깃이나 이불이 닿기만 해도 통증이 유발되는 이질통(allodynia)이 동반되기도 한다. 감각이 저하되어 상처나 화상, 골절을 자각하지 못하고 방치되는 일도 많다.
운동신경이 손상될 경우, 근육 약화, 경련, 마비, 운동 실조 등이 발생하며, 근육이 점차 위축되어 기능적 장애로 발전할 수 있다. 자율신경이 손상되면 혈압 조절 장애, 소화불량, 변비 혹은 설사, 땀 분비 이상, 발기부전, 체온 조절 문제까지 광범위한 기능 이상이 나타난다. 특히 자율신경병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기의 기능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환자가 인식하기 어렵고, 진단이 늦어지면 삶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는 요소가 된다. 말초신경병증은 한 가지 양상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감각·운동·자율 기능의 혼합형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정확한 진단이 치료의 출발점
말초신경병증의 진단은 무엇보다도 환자의 병력 청취와 증상 분석이 중요하다. 증상이 언제 시작됐는지, 대칭적인지, 통증이 있는지, 감각 저하와 함께 운동 기능 장애가 동반되는지 등을 상세히 파악한 후, 그에 따른 신경학적 검진을 실시한다. 진단을 확정하기 위해선 신경전도검사(NCV)와 근전도검사(EMG)가 대표적으로 시행된다. 신경전도검사는 신경에 전기 자극을 가해 전달 속도와 반응을 측정하며, 신경 손상의 위치와 종류(축삭성, 수초성 등)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혈액검사, 비타민 수치, 혈당 조절 상태, 자가면역 항체, 갑상선 기능 등을 함께 분석해 원인을 찾는 과정이 동반된다. 일부 환자에겐 신경조직 생검이나 MRI 검사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원인이 명확하게 확인된다면 원인 질환의 조절이 최우선 치료가 된다. 예컨대 당뇨병 환자는 혈당 조절을, 알코올성 신경병증 환자는 금주와 영양관리, 약물 유발성 환자는 약제 변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원인 미상의 특발성 신경병증도 많아, 이 경우엔 증상 완화와 신경 보호에 중점을 둔 대증치료가 중심이 된다.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한 꾸준한 관리가 열쇠
말초신경병증은 완치가 어려운 경우가 많고, 증상이 만성화되기 쉬운 질환이다. 따라서 조기에 발견하고 진행을 늦추며, 증상을 잘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치료에는 통증 조절을 위한 약물(가바펜틴, 프레가발린, 항우울제 등), 국소 진통제(캡사이신 크림, 리도카인 패치), 물리치료, 전기 자극치료(TENS) 등이 활용된다. 심한 통증이 지속되거나 자율신경계 이상이 동반되면 통증클리닉이나 재활의학과에서 다학제적 치료를 진행해야 한다.
또한 적절한 운동, 균형 잡힌 영양 섭취, 음주·흡연 제한 등이 예방과 진행 억제에 도움이 된다. 신경 재생은 시간이 오래 걸리며 완전 회복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손상 예방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감각이 저하된 환자는 발을 자주 살피고 상처를 관리하며, 실내에서도 미끄럼 방지 조치를 철저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 환자 스스로가 질병을 이해하고, 꾸준히 건강을 관리하며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장기적인 삶의 질을 유지하는 열쇠가 된다. 말초신경병증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삶을 위협하는 질환이며, 이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관리가 시작된다.